목소리만 큰 할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2025.07.20
**목소리만 큰 할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바베큐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 내가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또 내 개똥철학을 꺼내 들며 마치 세상의 진리를 다 아는 사람처럼 떠들었구나 싶었다. 말은 엉성했고, 결론은 흐릿했으며, 무엇보다 상대방이 듣고 싶지도 않았을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털어놓았다. 하지만 정말로 사람들이 내 말에 불편함을 느꼈을까? 어쩌면 그들은 그냥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정도로 가볍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안다. 내가 너무 과하게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다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관대하다는 걸, 누구도 완벽한 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한다. 이 끝없는 자기 분석을, 이 지나친 성찰을. 마치 몸에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끊지 못하는 담배처럼. 생각해보면, 그 불편함의 뿌리는 늘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 내 안의 단단한 확신, '내가 맞다'는 마음. 일할 때는 이 확신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다른 이들이 망설일 때 나는 밀어붙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룬 성취도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다르다. 특히 돈이나 미래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어느새 내 말에는 힘이 실리고, 나도 모르게 내 가치관을 보편적인 진리처럼 말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 지금 또 그러고 있구나.' 하지만 이미 말은 흘러나온 뒤다. 사실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정확히는 그 표출되는 방법이 문제다. 뭔가 내가 맞고 내가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이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런 자의식 과잉—심리학에서는 '주목의 착각' 혹은 '투명성 착각'이라고 부르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내 모든 말투와 태도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뭔가 상황을 껄끄럽게 만드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내 이야기가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만남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불가능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영향으로, 좀 더 자연스럽게 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생긴 어색한 순간들이 있다. 동료와의 회의 자리에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낯선 사람과의 첫 대화에서도. 내가 '옳다'고 느낀 순간, 그 확신이 말과 표정, 태도에 스며든다. 그러고 나면 미묘하게 달라지는 분위기를 느낀다. 뭔가 경직되는 공기, 조금씩 줄어드는 대화의 여백들. 물론 그런 순간들이 항상 관계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냥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로 어색해진 관계들이 있다. 어떤 이와는 내가 먼저 조심스러워졌고, 어떤 관계는 상대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극적인 이별이나 결별은 아니지만, 예전만큼 편하지 않아진 사이들. 그런데 곰곰이 돌아보면, 그 변화의 시작점에는 대개 내가 너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씩 커지고, 조금씩 독선적으로 변해간 그 목소리. 내 생각이 옳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말들. 그 말을 들으며 어딘가 모르게 굳어지던 상대방의 표정, 대화의 온도가 조용히 식어가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물론 그 기억들이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죄책감조차, 결국은 내 안의 그 목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내가 듣지 못한 말들, 놓쳐버린 표정들, 멈췄어야 했던 타이밍들. 그 자취들이 지금의 나를 따라다닌다. 예전 같으면 '에고가 너무 강하다'고 스스로를 탓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진단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에고가 강하다는 것은 어쩌면 그냥 핑계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런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그 특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하느냐의 방법론이다. 내가 정말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헌터헌터의 곤이 자주 떠오른다. 그 아이에게도 분명 자기 확신이 있다.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고, 때로는 그것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이기도 한다. 심지어 독선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고집이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 그 고집 뒤에 순수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곤의 확신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계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것이 옳다고 믿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을 때 '저 애가 나를 설득하려 하는구나'가 아니라 '저 애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인다. 진심은 전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의 감정에는 꾸밈이나 계산이 없다. 그리고 곤은 고집을 부릴 때도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지 않는다. '너는 틀렸어'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 차이가 크다. 전자는 상대방을 공격하지만, 후자는 자신의 입장을 표현할 뿐이다. 무엇보다 곤은 자신이 모든 걸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확신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분한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그의 고집이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어떤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서도 아는 척하며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나는 계속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려 한다. 말하는 연습을 한다기보다는, 함께 말하고 함께 생각하는 방식을 배워가고 있다. 곤처럼—확신을 품되, 그 확신이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도록 내어놓는 사람으로.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나는 목소리만 큰 할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말 앞에서 피로가 아닌 관심과 호기심이 머무는 얼굴들을 마주하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바뀌어야 한다. 내 확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확신을 나만의 울타리로 세우는 대신, 누군가와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창으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곤처럼—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하되, 그것이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도록 말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가져야겠다.